Before Story

 몽골족은 원래 중국 서북쪽 초원지대에서 부족 별로 흩어져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이었다. 몽골족은 여진족의 오랜 지배를 받았었는데, 금나라와 송, 요나라와 대립관계를 펼치던 중에 몽골부족을 최초로 통일한 것이다.(1206) 당시 유럽대륙은 황제와 교황의 권력싸움(카노사의 굴욕, 1077)과 십자군 전쟁이 진행 중이었고, 살라딘의 예루살렘을 탈환(1189), 일본의 카마쿠라 막부 성립(1192), 최충헌의 집권(1196)의 사건이 있었다.


Main Story



세계사 주요 사건



주요 흐름

 13세기 초반 몽골 초원지대에서 세계를 뒤흔든 영웅 테무친(칭기즈칸)이 등장했을 무렵, 세계는 관심을 쏟지 않았다. 유렵과 이슬람 사이에선 100년 넘게 십자군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중국에선 송과 요, 금나라의 전쟁이, 우리나라와 일본에선 무인세력이 집권해 서로 바빴기 때문이다. 1026년 테무친은 몽골의 모든 부족장을 제압한 다음 통일제국을 이룩한다. 통일 몽골의 첫번 째 타깃은 오랜 세월 몽골족을 지배해 온 금나라였다. 칭키즈칸은 1215년 금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점령 하였지만,  중국의 공성전에 어려움을 느껴 금을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하고 서방세계 정복으로 눈을 돌린다. 그의 군대는 알타이 산맥을 넘어 호라즘 왕국을 정복했고,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러시아 남부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어 크림반도를 넘어 볼가 강 유역까지 진출하고, 나라를 세운지 20년도 안되어 몽골제국은 중국에서부터 동유럽까지의 영토를 차지하게 된다. 



 동유럽까지 진출 한 칭키즈칸은 서하를 정복하기 위해 몽골제국으로 돌아왔다. 서하는 중국 북서부의 간쑤성, 산시성에 위치했던 티베트계 탕구트족의 왕조인데, 서정 참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칭키즈칸의 분노를 샀고, 서하 원정 중 칭키즈칸이 죽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칭기즈칸의 통치법

 칭키즈칸은 주변국을 정복하면서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러가지 혜택을 부여했다. 그러나 반항하게 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김없이 모조리 멸족시켰는데 전멸시킨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서 탑을 쌓았다. 바그다드와 이스파한 등의 지역에는 거의 100,000개 가량 되는 해골들로 탑을 쌓기도 했다. 또한 그는 상인들을 활용한 정보전도 능했는데, 그들로 하여금 상대국의 정확한 정보를 얻고, 그들을 통해서 몽골군의 잔혹함을 퍼트려 공포심을 유발하여 도망가게 하는 전략도 사용하였다.

 

칭기즈칸 이후 상황

 몽골에선 막내아들에게 모든 유산을 물려주는 풍습이 있었다. 그는 죽기전 손자(큰아들이 죽었기 때문에)에게 바투에게 라시아 남부 영토를, 둘째 아들 차가타이에게 호라즘 왕국의 영토를, 셋째 아들 오고타이에게 나이만 왕국의 영토를 주었고 막내 아들에게는 몽골 본국을 물려 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권력 투쟁에서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가 승리하였고, 오고타이는 1229년 쿠릴타이에서 칸으로 선출되어 몽골 제국의 제 2대 황제가 되었다. 오고타이는 금나라를 다시 공격해 완전히 멸망시켰고(1234년) 그의 조카 바투는 키예프 공국으로 쳐들어가 일주일만에 수도를 함락 시켰다. 이후 바투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폴란드와 헝가리로 진격했다. 1241년 몽골군은 폴란드를 돌파했고, 신성로마제국의 남부 연방국가에 까지 진격했다. 헝가리와 폴란드를 정복한 몽골 군대는 다시 오스트리아로 진격하기 위해 준비를 했다. 당시 헝가리와 폴란드는 정식 유럽국가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오스트리아는 정통 유럽국가로 여겨졌기에 그제서야 유럽사회는 공포에 휩싸였다. 하지만 바투가 오스트리아를 공략하려고 할 때, 오고타이 칸이 죽었고 바투는 칸이 되고 싶은 욕심에 군대를 돌려 회군한다.

 서아시아 쪽은 칭기즈칸의 손자 홀라구였는데, 그는 1258년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셀주크 왕조, 아바스 왕조 등 모든 이슬람 왕조를 정복했다. 이후 훌라구는 서아시아에 칸국을 세워 통치하였다. 훌라구의 칸 국은 몽골족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하기도 하며 이슬람 문화와 융합되어 150여년간 통치를 하였고, 이후 페르시아 혈통과 투르크족 혈통의 반란으로 몽골계 티무르 왕조와 페르시아계 사파비 왕조, 투르크의 오스만 왕조로 분열되고 만다.


원나라의 건국과 의의

 2대 황제 오고타이 칸이 죽은 후 지배층은 피비린내 나는 내분을 겪었고, 5대 칸 쿠빌라이가 황제로 등극하면서 중국에 정착하였다. 이는 유목민족의 피를 이어가겠다는 몽골족이 스스로 정착하여 중국이 되겠다는 결심이다. 그는 1271년 몽골식 표기를 버리고 중국식에 따라 나라 이름을 원으로 바꾸고, 남송을 공격하여 1279년 남송을 멸망시켰다. 이제서야 몽골족은 중국의 하나밖에 없는 왕조가 된 것이다.

원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은 동서양의 활발한 교류이다. 원나라 이전 까지는 전투력이 강한 유목민족들이 중앙아시아를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시아나 유럽사람들은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원이 중앙아시아 전체를 지배했기 때문에 자유롭게 무역을 오 갈 수 있었고, 이 때문에 활발히 무역이 펼쳐져  비단, 향료, 인쇄술, 화약제조기술, 도자기 제조기술 등이 서양에 전해졌다. 마르코 폴로는 13세기에 아시아의 여행담을 기록한 책 동방견문록(1권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2권 원나라, 3권 일본, 동남아시아, 아프리카)을 발간했고 유럽사람들은 중국을 일확천금을 얻을 수 있는 나라라고 믿게 만들어버렸다. 


원나라의 멸망

원나라는 100년도 채우지 못하고 무너졌다. 특히 심한 권력투쟁이 문제였는데 몽골과 중국의 상속제도 때문이라는 주장이 유력하다. 몽골에선 막내에게 유산을 상속하지만, 중국은 장자에게 유산을 상속하기에 원나라는 74년간 10명의 황제가 바뀌는 등 심각한 혼란을 겪었고, 여기에 극심한 한족 억압정책으로 전국에서 한족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반란군 세력 중 가장 세력이 컸던 주원장이 14세기 중반 원을 타도하고 난징에 명나라를 세운다. 이후 주원장은 몽골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북벌을 단행하였고 몽골족은 자신들이 태어난 몽골 초원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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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10.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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