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정치의 설계자, 이황


 이황은 심성론에 대한 연구와 강학을 통하여 조선 성리학의 수준을 격상시킨 학자이다. 향약 제정과 서원 건립으로 사림이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고 성리학의 정치적, 사회적 관념이 사회 곳곳에 퍼질 수 있도록 하였다. 기대승과의 사단칠정 논쟁은 조선 전역으로 파급되어 성리학의 학문의 깊이가 깊어지고, 훗날 다양한 붕당이 나타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즉 이황은 중국과는 차별화 된 조선 만의 성리학이 발전될 수 있게 만든 설계자이다. 이 글에서는 이황의 성장 과정과 그의 사상, 조선에 남긴 영향을 중심으로 이황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등장배경연산과 함께 시작된 사화의 시대


 퇴계이황(1502-1571)이 태어난 16세기 조선은 사화로 인해 혼란한 사회였다. 조선의 건국을 주도한 신진사대부는 건국 후 관학파로 입지를 굳혔다. 국가 기간을 잡기위한 여러 사업에 참여하여 성과를 내기도 하였으나, 방납과 공신전의 막대한 토지로 경제적 이익을 독점하는 훈구세력으로 변질되었고, 신진세력인 사림은 이런 훈구세력을 견제하였다. 성종대 까지는 성종의 지도력으로 훈구와 사림은 정치적 입장은 달랐어도 양파간 균형을 유지하였다, 오히려 두 세력이 협력하여 <경국대전>을 비롯한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기념비적인 편찬사업의 결과를 내었다. 하지만 연산이 즉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연산은 생모(성종의 부인 윤씨)가 윤필상 등 신하들의 충동으로 죽게 된 것을 알고 이때부터 훈구와 사림 모두 눌러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연산은 평소 활발한 언론활동으로 왕권을 견제하는 사림을 싫어하였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평소 사림의 공격을 받던 훈구는 사림의 김일손이 지은 사초(김종직이 단종을 위해 지은 제문으로 이 글은 비유적으로 세조의 정통성을 문제삼았다.)를 문제삼았고 연산은 김일손 등 수십명의 사림을 사형, 혹은 유배의 형을 내렸다 [무오사화].

 또한 연산 10년에는 연산이 자신의 어머니가 윤필상 등 훈신들의 청으로 죽은것을 알고, 이 사건에 관여한 훈신들과 남아있던 사림을 몰아냈다[갑자사화]. 두 차례의 사화로 비판세력을 숙청한 연산은 사치와 방탕을 일 삼았고, 연산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성희안 등 신하들이 군대를 동원하여 연산을 강화로 추방하고, 그의 이복동생 진성군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하지만 중종을 옹립한 공신들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중종은 조광조를 비롯한 젊은 사림은 현량과를 통해 불러 들였다. 조광조 일파는 군주의 바른 통치와 지방사회의 안정을 주장하였다. 연산의 학정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군주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최 우선임을 깨달아 이를 주장하였고 또한 향촌사회의 자울과 안정을 위해 향약의 실시와 <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주자가례>, <소학>등 성리학 이론과 예를 지방사회로 보급하는 것을 개혁안으로 삼았다. 또한 사림은 반정공신으로 책봉된 100명중 3/4은 부당하게 선정되었으므로 이를 취소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공신세력들의 큰 반발을 샀다. 중종은 처음에는 사림을 크게 신뢰하였으나, 지나치게 왕권을 압박하는 것에 불만이 있었고 이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공신세력들은 사림에 반역죄의 누명을 씌워 죽이거나 귀양보냈다.[기묘사화] 기묘사화 당시 이황의 나이는 18세였으며 이후 선조가 즉위하기 전 까지인 명종 대까지 훈구와 사림의 대립은 끊이지 않았다.


성장과정세상의 비웃음거리가 된 아기 백조


 이황은 무신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황의 증조부 이정은 활쏘기와 말몰기에 능했던 무인으로 세종대에 여진족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이정의 아들 이계양(이황의 조부)은 과거 합격에 뜻을 두지 않고 시골에 은거하여 후손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았는데, 이황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셔 조부에 의지를 했다. 후일 이황이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강학에 몰두한 것은 조부에게서 물려받은 가학 전통이라고 볼 수 있다. 이황의 어머니는 남편이 없는 상황에서도 6남 1녀를 길렀다. 그녀는 자식들이 과부의 아들이라 행실이 불량하다는 말을 듣기 싫어하여 행실과 몸가짐, 절약에 큰 힘을 쏟았는데 훗날 이황이 인품적으로 큰 존경을 받는 데에 영향을 미쳤다. 자식을 너무 바르게 키웠던 탓 일까? 이황은 기묘사화 직후인 23세에 소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다녔는데 이황의 행동거지는 엄격하였다. 사화로 선비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시기여서 인지 그의 올바른 행동은 주변에서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고, 실망한 이황은 두 달만에 성균관을 떠난다. 이황은 이후 성리학 연구에 힘쓰며 김인후 등 당시 저명한 학자들과 교류하며 지낸다. 10년 후인 33세의 이황은 다시 성균관에 유학하였는데 이때부턴 성균관의 많은 성균관의 선비들이 그의 인품과 학식을 존경하였다고 한다.


혼란한 사회에서 고군분투


 이황은 3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지만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21세에 첫 장가를 들었지만 26세에 아내가 죽고 이어 안동권씨 가문과 결혼하였지만 그의 장인 권질의 형인 권전이 기묘사화 때 죽었다. 새로운 인재를 거부하는 당시 기득권층의 견제도 있었지만 권질의 사위라는 이유로 승진을 못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 1535년 부터는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는데 주요 활동으로는 홍문관, 사간원의 자리에 있었고 경연에서 수차례 임금의 바른 행동과 외척의 득세를 경계하는 간언을 올리기도 하였다. 정국은 여전히 혼란하였는데 중종 말 중종과 인종이 잇따라 죽고, 어린 명종이 왕위에 오르자 외척간의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을사사화가 일어나 여러 선비가 죽었고 이에 이황은 정국에 회의감이 들어 외직을 요청하여 단양군수에 이어 풍기군수로 갔다. 지방관으로서 이황은 고을을 정성스럽게 다스리고 백성을 측은이 여기고, 업무를 청결하고 간결하게 처리했기에 아전이나 백성들 모두가 편안히 여겼다고 한다. 

 이황은 부임한지 1년 후에 풍기군의 북쪽에 위치한 백운동서원에 판액과 서적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는데, 이에 조정은 소수서원이라는 이름과 판액, 사서오경과 성리대전의 책을 내려 주었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서원의 발달이 바로 여기서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서원의 발달은 훗날 지방에서 사림을 육성하여 인재를 중앙정계로 보내고, 더 나아가 지방사회에서 성리학 문화의 정착과 서원을 중심으로 한 학파 형성이라는 혁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혁명을 이황이 노리고 일부러 외직을 신청하여 나아간 것인지, 단순히 조부의 영향을 받아서 벌인 일인지도 논의가 되고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이황의 행동은 조선 중기 사회, 문화를 바꾸는 씨앗이 되었다.


도산에서의 사상과 활동

 이황은 벼슬에서 완전히 물러나 고향에서 제자를 기르는 방법을 택하였다. 병을 이유로 사직을 하고, 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조정에서는 이황을 수차례 불러 그가 복귀하기를 원하였으나, 그는 수차례 거부를 하고 벼슬에 오른다고 해도 금방 사직하기를 반복하였다. 그의 나이 58세에 도산서당을 짓고 본격적으로 강학에 힘썼다. 그리고 이 해에 기대승과의 사단칠정 논쟁이 벌어졌다.


 성리학과 사단칠정


 본래 유교는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기원전 770~403)말기 공자가 체계화한 유학을 이르는 말이다. 유학은 사람이 지켜야할 인륜에 대한 가르침으로 핵심사상은 수기치인, 즉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며 실천 방안으로 볼 수 있다. 유교는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었고 형이상학적 문제를 다루는 불교에 비하여 이론적으로는 부족하게 보였다. 이에 12세기 주희(주자)가 유교의 이론적 체계를 잡았는데 이를 성리학이라고 한다. 주희는 성리학을 존재론적 측면에서 우주만물을 이(理)와 기(氣)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란 원리, 진리, 도덕규범 등 추상적인 형이상학적 개념이고 기는 물질로 보여지는 현실적 존재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말을 타고 달리는 사람이 있다고 보면 달리는 말은 기이고, 말을 달리게하는 무언가가 이라는 것이다. 어렵다면 이는 보이지 않는 원리, 기는 보이는 물질이라고 봐도 괜찮다. 사단(四端)은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칠정이란 사람이 갖고 있는 일곱 가지 감정, 즉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을 말한다.

사단 칠정논쟁은  이황이 정지운(鄭之雲) 지은 천명도설 天命圖說≫의 내용 가운데사단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四端發於理 七情發於氣).” 구절을사단은 이의 발이고, 칠정은 기의 발이다(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라고 수정한 데서 연유하였다. 수정에 대해 기대승이 이의를 제기하는 편지를 이황에게 보냄으로써 7년에 걸친 논변이 시작되었다.

 기대승은 칠정의 선한부분이 사단이라고 보고, 이와 기는 상호작용으로 결합되어 적용되는 것이지 이와 기가 분리 되서 적용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는 사단에서, 기는 칠정에서 발한다는, 사단과 칠정을 분리시키고 이가 스스로 발할수 있다고 본 이황의 논지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가 스스로 발할수 있다는 이황의 이발의 주장에 대하여 훗날 이이는 활동성과 작용성을 가지지 않는 이가 발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였는데 이와 연관시켜 생각해보면 이해하기가 좀 더 수월할 것이다. 아무튼 이 사단칠정의 논쟁은 7년동안의 논쟁 이후에도 훗날 호발론을 인정한 성혼과 인정하지 않는 이이학파로 갈려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는 붕당정치의 시작점이 되며 이후 약 300여년간 논쟁은 계속 된다. 이 사단칠정을 통해서 이황은 그의 사상에서 기에 대한 이의 우위를 분명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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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1. 12. 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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